대법원 1992.2.11. 91도2951
[사건개요]
甲은 조카인 乙(10세)과 丙(8세)을 살해할 것을 마음먹고 그들을 불러내어 미리 물색하여 둔 저수지의 인적이 드물고 경사가 급한 제방 쪽으로 함께 걷게 하여, 乙로 하여금 약 2미터 수심의 물속으로 미끄러져 빠지게 한 후, 그를 구호도 하지 아니한 채 앞에 걸어가고 있던 丙의 소매를 잡아당겨 저수지에 빠뜨림으로써 그 자리에서 乙과 丙을 익사하게 하였다. 甲은 乙과 丙에 대한 살인죄로 기소되어 원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丙에 대한 살인죄의 기수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아직 실행의 착수에 이르지 아니한 예비단계에서 스스로 물속으로 미끄러져 빠진 乙에 대하여서까지 살인죄의 기수를 인정한 것은 잘못이라며 상고하였다.
[죄명 및 참조조문]
乙에 대한 살인죄 - 형법 제250조, 제18조 부작위범
丙에 대한 살인죄 - 형법 제250조 작위범
[판결요지]
[1] 형벌이 금지하고 있는 법익발생을 침해의 결과발생을 방지할 법적인 작위의무를 지고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결과발생을 쉽게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발생을 용인하고 이를 방관한 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에, 그 부작위가 작위에 의한 법익침해와 동등한 형법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그 범죄의 실행행위와 동일하게 부작위범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2] 피고인이 조카인 피해자(10세)를 살해할 것을 마음먹고 저수지로 데리고 가서 미끄러지기 쉬운 제방 쪽으로 유인하여 함께 걷다가 피해자가 물에 빠지자 그를 구호하지 아니하여 피해자를 익사하게 한 것이라면, 피해자가 스스로 미끄러져서 물에 빠진 것이고 그 당시는 피고인이 살인죄의 예비단계에 있었을 뿐 아직 실행의 착수에는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숙부로서 익사의 위험에 대처할 보호능력이 없는 나이 어린 피해자를 익사의 위험이 있는 저수지로 데리고 갔던 피고인으로서는 피해자가 물에 빠져 익사할 위험을 방지하고 피해자가 물에 빠지는 경우 그를 구호하여 주어야 할 법적인 작위의무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피해자가 물에 빠진 후에 피고인이 살해의 범의를 가지고 그를 구호하지 아니한 채 그가 익사하는 것을 용인하고 방관한 행위(부작위)는 피고인이 그를 직접 물에 빠뜨려 익사시키는 행위와 다름없다고 형법상 평가될 만한 살인의 실행행위라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
Ⅰ 사안의 쟁점
부진정부작위범은 작위범의 구성요건을 부작위를 통해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부작위범의 일반요건 이외에도 부작위에 의한 구성요건실현이 작위에 의한 구성요건실현과 동일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 요구된다. 이를 간단히 부작위의 동치성이라고 하는데, 사안에서 甲이 부진정부작위범의 특유한 요건을 구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쟁점이다.
Ⅱ 부진정부작위범에 있어서 특유한 구조
부진정부작위범의 경우는 부작위에 의해서 작위범의 구성요건을 실현한다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부진정부작위범에만 특별히 요구되는 구성요건요소가 존재한다.
부진정부작위범은 작위범의 구성요건을 부작위에 의해서 실현하는 것이므로, 소극적인 부작위에 의한 범행이 적극적인 작위에 의한 구성요건실현과 동등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을 요한다. 이를 부진정부작위범의 동치성(부작위의 동치성)이라 하는데, 동치성의 제1요소로서는 보증인적 지위가 그리고 제2요소로서는 행위정형의 동치성이 요구된다.
우리 형법은 제18조(부작위범)에서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부작위에 의하여 작위범의 구성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작위범의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결과의 발생만으로는 부족하고 일정한 작위의무자의 부작위로 이러한 결과가 발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제1요소인 보증인적 지위에 대하여 명시하고 있다. 반면 행위정형의 동치성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다. 하지만 부진정부작위범의 성립에 행위정형의 동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 통설과 판례의 입장이다.
Ⅲ 보증인적 지위(동치성의 제1요소)
부진정부작위범은 작위의무자만이 범할 수 있는 범죄로서 일종의 ‘진정신분범’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결국 작위의무로부터 보증인적 지위가 도출되는데, 형법 제18조는 이에 대해 ‘자기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 즉 선행행위만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보증인적 지위의 발생근거는 많은 부분이 학설에 의하여 해결될 수밖에 없다.
1. 보증인지위의 발생근거에 관한 학설
(1) 형식설(법원설)
작위의무의 실질적 내용보다 그 발생근거만을 문제 삼아 법령, 계약, 조리 또는 선행행위에 의하여 작위의무가 인정되면 족하는 것으로 본다.
(2) 실질설(기능설)
법익의 보호기능이라는 실질적 기준에 따라 보호의무상황과 안전 또는 지배의무상황을 작위의무의 발생근거로 이해하는 설이다.
(3) 절충설
형식설은 형법적 작위의무의 문제를 사법적 사고에 지나치게 예속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고, 실질설은 보증인지위의 발생근거를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보증인지위가 지나치게 확대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이 있어, 이 두 견해를 결합시켜 보증인지위의 내용과 한계를 결정하는 절충설의 입장이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2. 형식설에 따른 작위의무의 발생
(1) 법령
법령에 의한 작위의무는 법령상의 의무가 행위자의 신분상의 이유로 인해서 행위자에게 특별히 부과되어 있을 때에만 인정된다. 친권자의 보호의무(민법 제913조), 부부간의 부양의무(민법 제826조), 생계를 같이 하는 친족간의 부양의무(민법 제974조), 의사의 진료와 응급조치의무(의료법 제16조), 경찰관의 보호조치의무(경찰관직무집행법 제4조), 사고운전자의 피해자구호의무(도로교통법 제50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2) 계약
보호의무를 사실상․자발적으로 인수한 경우로 고용계약에 의한 보호의무, 간호사의 환자간호의무, 사무관리자의 관리계속의무, 보모의 아동보호의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3) 선행행위
과실로 상해를 입힌 자의 피해자 구조의무, 실화자의 소화조치의무, 탈진상태에 있는 피감금자에 대한 감금자의 구조의무, 공사장감독자의 위험물 제거의무, 어린애를 미끄러지기 쉬운 저수지의 제방쪽으로 유인한 자의 보호의무, 방바닥에 촛불이 켜진 방에 만취자를 눕힌 자의 소등의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4) 조리(사회상규)
동거자에 대한 고용주의 관습상의 보호의무, 목적물의 하자에 대한 신의칙상의 고지의무, 관리자의 위험발생방지의무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3. 실질설에 따른 작위의무
(1) 보호의무
부작위범과 피해자 사이의 보호관계로 인하여 일정한 법익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발생하는 경우이다. 부모자식․친족․부부상이와 같은 가족적 보호관계, 자의에 의해 형성된 위험공동체, 보호의무의 자발적 인수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2) 안전의무(지배의무)
일정한 위험원을 감시․감독해야 할 의무, 타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 선행행위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다만 선행행위에 의한 보증인지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① 선행행위는 법익침해에 대한 직접적이고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 ② 그 선행행위는 위법하거나 적어도 일반인이라면 지켜야 할 객관적 주의의무에 위반한 것 ③ 이 객관적 주의의무위반은 문제의 법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정된 규범위반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Ⅳ 행위정형의 동치성(동치성의 제2요소)
1. 작위범의 구성요건은 ① 결과발생만 있으면 구성요건이 충족되는 단순결과범(예:살인죄, 손괴죄 등)과 ② 구성요건적 행위의 수단․방법이 특정되어 있어서 일정한 행위태양에 의해서만 구성요건이 충족되는 행태의존적 결과범(예:사기, 공갈, 폭행, 협박죄 등)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 따라서 행위정형의 동치성 역시 ‘결과발생의 동치성’(위 ①의 경우)과 ‘행위태양의 동치성’(위 ②의 경우)의 두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위 ①의 순수한 결과범인 경우에는 일단 결과야기만 있으면 족하다. 따라서 이 경우에 부진정부작위범의 성립 여부에 있어서는 보증인의 지위만이 문제가 되며, 행위정형의 동가치성이라는 것은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위 ②의 구성요건의 행위의 수단․방법이 특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결과의 야기뿐만 아니라 그 일정한 수단․방법에 해당하는 행위반가치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위 ②의 경우는 행위정형의 동가치성이 부진정부작위범의 성립범위를 축소하는 역할을 한다.
Ⅴ 사안의 검토
1. 본 사안 문제의 구성요건인 살인죄는 순수한 결과범이다. 따라서 乙의 사망이라는 결과가 발생한 이상 행위정형의 동가치는 문제될 것이 없다. 문제는 甲의 보증인적 지위 즉 작위의무의 여부이다.
대법원은 “...① 저수지로 데리고 가서 미끄러지기 쉬운 제방쪽으로 유인하여 함께 걷다가...② 피해자의 숙부로서 익사의 위험에 대처할 보호능력이 없는 나이 어린 피해자가 물에 빠지는 경우 그를 구호하여 주어야 할 법적 작위의무가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여기서 ①의 경우는 선행행위에 근거를 둔 것이고, ②의 경우는 민법 제974조의 친족간의 부양의무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甲이 동거친족이 아니라면 ②는 보증인적 지위의 발생근거가 될 수 없으므로 ①만이 근거가 될 수 있다.
사안의 경우 甲은 1) 경사가 급한 저수지로 데리고 갔으므로 甲의 선행행위는 법익침해에 대한 직접적이고 상당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2)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어린 조카를 미끄러지기 쉬운 제방쪽으로 유인하여 걷게 했으므로 甲의 선행행위는 객관적 주의의무에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3) 이는 어린 조카의 생명이라는 법익을 보호하기 위한 규범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甲에게는 선행행위로 인한 보증인적 지위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2. 본 사안에서 甲은 살인의 고의를 가지고 피해자들을 저수지의 가파른 제방으로 데리고 가서(살인예비에 해당) 피해자가 스스로 미끄러져서 물에 빠지자 구호하지 아니한 채 이를 방관함으로써(부작위로 나아감) 사망케 했으므로 살인죄가 성립함은 의문이 없다. 다만, 이 경우 언제 실행의 착수가 있었던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 견해가 대립될 수 있다.
부진정부작위범의 실행의 착수시기에 관해서는 ① 작위가 가능한 최초의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 설(乙이 물에 빠졌을 때) ② 결과방지가 가능한 마지막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 설(乙③이 익사에 직면했을 때) ③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위험이 발생하거나 기존의 위험이 현저히 증대되었을 때를 기준으로 삼는 설(乙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등이 있는데, 본 판례가 어느 견해를 따르고 있는 지는 분명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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